대항해시대

말을 버리고 배를 탔다… 대항해시대 앞장선 기사단

엘랑비탈 2019. 1. 3. 10:10

태그 : 포르투칼, 엔히크, 토마(Tomar), 성전기사단, 그리스도 기사단, 대항해시대

 

말을 버리고 배를 탔다대항해시대 앞장선 기사단

 

토마(Tomar)는 포르투갈 중부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코임브라에서 리스본으로 이어지는 포르투칼 교통로의 중앙에 위치함

과거에는 풍요롭기로도 으뜸이었음

성벽 안쪽의 정원은 드넓고, 건물은 웅장함

- 그 건물의 실체는 성당이며 수도원이었음. 이곳의 주인이 기사단이었기 때문임.

- 기사들은 왜 토마르까지 왔을까?


중세의 기사단은 돈이 많았다. 특히 성전기사단은 가장 부유했다.


포르투칼이 십자군에 의해 건국된 나라라는 사실

이베리아 반도를 무슬림으로부터 되찾는 재정복운동 즉,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탄생

- 레콩키스타는 500년 가까운 세월이 걸림

- 기독교 세력과 무슬림 세력은 일진일퇴를 거듭함

누가 지킬 것인가?

- 십자군의 산물인 기사단. 기사단은 수사와 기사가 결합한 하나님의 전사.

- 그들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수사처럼 집단생활을 했음.

- 교황과 기사단장의 명령에만 복종했고 하나님의 적과 싸우는 것만이 삶의 이유.


성전기사단

1차 십자군의 결과로 예루살렘 왕국이 세워진 1119년에 출범. 목표는 예루살렘 수호와  순례들의 보호.

유럽의 많은 왕과 귀족들의 대규모 기부를 통해 성전기사단은 막강한 국제조직으로 성장

포르투칼 건국자 아폰수 1세의 어머니는 1128년 섭정의 자격으로 성전기사단을 받아들이고 무슬림과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방대한 토지를 기증함

포르투칼 영토가 남쪽으로 확장되면서 성전기사단 본진도 남하.

- 1160년 성전기사단은 토마르에 본부를 세움. 거대한 교회와 웅장한 성채는 이때 지어짐


그리스도 기사단으로 신분세탁

막대한 무력과 재산으로 기독교 군림하던 성정기사단에 종말이 찾아옴

- 프랑스와 필리프 4세가 앞장서 이단 혐의를 씌움

- 성전기사단은 해체됐고 주요 인물들은 불타 죽음.

여파는 전 유럽으로 퍼짐. 당시 포르투칼 왕은 성전기사단을 해체하되 그들을 새롭게창단하는 그리스도 기사단에 통합할 수 있도록 교황에게 요청

- 그리스도 기사단으로 신분세탁에 성공한 성전기사단은 여전히 막강한 부와 권력을 포트투칼에서 누림

- 프랑스는 기사단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포르투칼은 그들이 필요했음

Ÿ 동족으로부터 포르투칼의 자유와 독립을 위협해오는 카스티야 때문.

Ÿ 성전기사단은 북아프리카와 세우타 정복에도 왕실과 동행하여 자신들의 필요성을 충분히 입증함

 

대항해시대의 돈줄

주앙1세는 셋자 아들이며 세우타 정복 과정에서 무용을 증명한 엔히크(1394~1460)를 기사단의 총괄책임자로 임명

- 이제 막 바다 대척을 꿈꾸던 엔히크에게 부유한 그리스도 기사단은 든든한 버팀목.

엔히크는 포르투칼 최남단 사그레스에 세운 항해학교에 기사단의 자금을 투하함

- 아무런 수익도 없고, 성공가능성도 없는 무의미한 사업이란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엔히크가 바다 개척을 꾸준하게 밀고나갈 수 있었던 것은 기사단의 돈이 있었기 때문이다.

용맹한 기사들도 말을 버렸고, 엔히크의 명에 따라 배를 탔다.

- 그들은 망망대해로 나아가는 배의 돛을 기사단의 상징인 사각꼴의 붉은 십자가로 장식했다. 엔히크는 죽는 순간까지도 바다를 향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 그리스도 기사단의 모든 것을 자신의 꿈에 투자하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기사단은 대항해시대의 첨병이 됐다.

- 훗날 인도로 가는 길을 개척한 바스크 다 가마도, 브라질을 발견한 페드루 카브랄도, 스페인으로 건너가 최초로 세계일주에 나선 페르난도 마젤란도 모두 그리스도 기사단 출신이었다.

 

기사도 선구자도 가고 성채만 남아

엔히크는 이곳에 기사들의 묘지를 겸한 중정을 지음

- 대항해시대에 투신헀던 그리스도 기사단 단원들의 무덤이 놓여 있음

- 성채로 올라오는 길 입구에 서 있던 엔히크 동상과 무덤들이 오버랩됨

- 중세를 누비며 무슬림과 싸웠던 기사들도 가고, 범선을 타고 바다를 갈랐던 기사들도 갔다.대항해시대를 열었던 항해 왕자도 559년 전에 떠났다.

경이로운 것은 보이지 않는 유산이다.

- 기사들의 배는 중세를 가르는 날카로운 검이었음.

- 엔히크의 바다 개척은 중세의 근간을 흐르는 파괴적인 야망이었다.

- 여전히 중세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곳 토마르에서 근대가 잉태됐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1/03/201901030007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