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포르투칼, 엔히크, 토마(Tomar), 성전기사단, 그리스도 기사단, 대항해시대
말을 버리고 배를 탔다… 대항해시대 앞장선 기사단
□ 토마(Tomar)는 포르투갈 중부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 코임브라에서 리스본으로 이어지는 포르투칼 교통로의 중앙에 위치함
○ 과거에는 풍요롭기로도 으뜸이었음
○ 성벽 안쪽의 정원은 드넓고, 건물은 웅장함
- 그 건물의 실체는 성당이며 수도원이었음. 이곳의 주인이 기사단이었기 때문임.
- 기사들은 왜 토마르까지 왔을까?
□ 중세의 기사단은 돈이 많았다. 특히 성전기사단은 가장 부유했다.
□ 포르투칼이 십자군에 의해 건국된 나라라는 사실
○ 이베리아 반도를 무슬림으로부터 되찾는 재정복운동 즉,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탄생
- 레콩키스타는 500년 가까운 세월이 걸림
- 기독교 세력과 무슬림 세력은 일진일퇴를 거듭함
○ 누가 지킬 것인가?
- 십자군의 산물인 기사단. 기사단은 수사와 기사가 결합한 하나님의 전사.
- 그들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수사처럼 집단생활을 했음.
- 교황과 기사단장의 명령에만 복종했고 하나님의 적과 싸우는 것만이 삶의 이유.
□ 성전기사단
○ 1차 십자군의 결과로 예루살렘 왕국이 세워진 1119년에 출범. 목표는 예루살렘 수호와 순례들의 보호.
○ 유럽의 많은 왕과 귀족들의 대규모 기부를 통해 성전기사단은 막강한 국제조직으로 성장
○ 포르투칼 건국자 아폰수 1세의 어머니는 1128년 섭정의 자격으로 성전기사단을 받아들이고 무슬림과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방대한 토지를 기증함
○ 포르투칼 영토가 남쪽으로 확장되면서 성전기사단 본진도 남하.
- 1160년 성전기사단은 토마르에 본부를 세움. 거대한 교회와 웅장한 성채는 이때 지어짐
□ 그리스도 기사단으로 신분세탁
○ 막대한 무력과 재산으로 기독교 군림하던 성정기사단에 종말이 찾아옴
- 프랑스와 필리프 4세가 앞장서 이단 혐의를 씌움
- 성전기사단은 해체됐고 주요 인물들은 불타 죽음.
○ 여파는 전 유럽으로 퍼짐. 당시 포르투칼 왕은 성전기사단을 해체하되 그들을 새롭게창단하는 그리스도 기사단에 통합할 수 있도록 교황에게 요청
- 그리스도 기사단으로 신분세탁에 성공한 성전기사단은 여전히 막강한 부와 권력을 포트투칼에서 누림
- 프랑스는 기사단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포르투칼은 그들이 필요했음
동족으로부터 포르투칼의 자유와 독립을 위협해오는 카스티야 때문.
성전기사단은 북아프리카와 세우타 정복에도 왕실과 동행하여 자신들의 필요성을 충분히 입증함
□ 대항해시대의 돈줄
○ 주앙1세는 셋자 아들이며 세우타 정복 과정에서 무용을 증명한 엔히크(1394~1460)를 기사단의 총괄책임자로 임명
- 이제 막 바다 대척을 꿈꾸던 엔히크에게 부유한 그리스도 기사단은 든든한 버팀목.
○ 엔히크는 포르투칼 최남단 사그레스에 세운 항해학교에 기사단의 자금을 투하함
- 아무런 수익도 없고, 성공가능성도 없는 무의미한 사업이란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엔히크가 바다 개척을 꾸준하게 밀고나갈 수 있었던 것은 기사단의 돈이 있었기 때문이다.
○ 용맹한 기사들도 말을 버렸고, 엔히크의 명에 따라 배를 탔다.
- 그들은 망망대해로 나아가는 배의 돛을 기사단의 상징인 사각꼴의 붉은 십자가로 장식했다. 엔히크는 죽는 순간까지도 바다를 향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 그리스도 기사단의 모든 것을 자신의 꿈에 투자하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 기사단은 대항해시대의 첨병이 됐다.
- 훗날 인도로 가는 길을 개척한 바스크 다 가마도, 브라질을 발견한 페드루 카브랄도, 스페인으로 건너가 최초로 세계일주에 나선 페르난도 마젤란도 모두 그리스도 기사단 출신이었다.
□ 기사도 선구자도 가고 성채만 남아
○ 엔히크는 이곳에 기사들의 묘지를 겸한 중정을 지음
- 대항해시대에 투신헀던 그리스도 기사단 단원들의 무덤이 놓여 있음
- 성채로 올라오는 길 입구에 서 있던 엔히크 동상과 무덤들이 오버랩됨
- 중세를 누비며 무슬림과 싸웠던 기사들도 가고, 범선을 타고 바다를 갈랐던 기사들도 갔다.대항해시대를 열었던 항해 왕자도 559년 전에 떠났다.
○ 경이로운 것은 보이지 않는 유산이다.
- 기사들의 배는 중세를 가르는 날카로운 검이었음.
- 엔히크의 바다 개척은 중세의 근간을 흐르는 파괴적인 야망이었다.
- 여전히 중세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곳 토마르에서 근대가 잉태됐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1/03/2019010300076.html